무장도 허술한 데다가 귀중품을 싣고, 게다가 금을 운반한 다는 소문까지 도는 카라반을 끌고 아프가니스탄의 중심부를 통과하는 일은 좋은 시절에도 위험한 일이었다. 하물며 나라가무 정부 상태에 빠져 내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대단 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으며, 어떻게 보면 무모한 일이 었다. 그러나 무어크로프트 일행은 지금 대담하게 그 일을 하려고 했다. 몸과 물품 이 모두 말짱하게 옥수스 강변에 도착할 가능성은 적었다. 게다가 그 들보다 먼저 퍼진 황당한 소문 몇 가지는 그들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 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다. 한 가지 소문은 그들이 사실은 영국 침략군의 비밀 전위이며, 아프 가니스탄을 합병하기 전에 정찰을 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오래지 을 어크로프트가 바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편지를 캘커타에 보낸 것을 보면, 어쩌면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무어크로프트 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무어크로프트는 만일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먼저 손을 대지 않으면 러시아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게다가 두 경쟁하는 분파가 아프가니스탄의 왕좌 를 놓고 다투고 있는 지금보다 더 나은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무어 크로프트는 왕좌에 말 잘 듣는 후보를 앉히는 데 영국군 1개 연대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루도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훨씬 더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이 자신들의 독창적인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아프가니스탄은 결국 영국 제국주의 역사에서 큰 자리를 차 지하게 되었으며, 무어크로프트는 단지 시대를 앞섰을 뿐이다. 무어크로프트 일행이 크게 당황했던 또 하나의 소문은 안전한 통 행을 보장해주면 그 땅에 사는 부족에게 큰돈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 들은 늘 공격이나 배반을 두려워했지만, 그럼에도 수의사 무어크로 프트의 솜씨 덕분에 친구들도 생겼다 . 가축에게 생계를 전적으로 의 존하는 땅에서 수의사는 귀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가혹한 여름은 그들 모두에게 심각한 시련이었다. 심지어 개까지 영 향을 받아, 두 마리가 일사병으로 죽기까지 했다. 무어크로프트는
기가 마치 대장간 용광로에서 뿜어져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들은 여행을 하면서 평소와 마찬가지로 사람과 지형, 야생동물과 가 축, 농업과 문화유산에 관하여 메모를 많이 했다.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바미안의 거대한 불교 유적지에 발을 디딘 그들은 절벽면에 깎 아놓은 거대한 두 형체를 바라보며 경외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들은 큰 쪽의 높이가 45미터라고 계산했는데, 실제로는 그보다 10미터 정도 더 높았다. 그들은 동굴에 자신들의 이름을쓰기도 했 다. 150년 뒤에도 무어크로프트의 이름은 그곳에 남아 있었다. 마침내 카이베르 고개에 들어서고 나서 거의 여덟 달이 지난 뒤, 일련의 힘겨운 장애물을 통과한 그들은 옥수스 강변에 이르렀다. 그에 발을 들여 놓은 첫 영국인들이었다. 그들이 겪은 위험과 난관을 그권할 때, 그것은 엄청난 용기와 결단을 보여주는 업적이었다. 옥수 스강은 위낙 외진 곳에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 강을 본 유럽인 은 거의 없다. 그나마 대개는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와 카 부사이를 날아가다 공중에서 본다. 무어크로프트는 이 강의 건략적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틀림없이 코사크 병사들이 말과 함께 강을 헤엄쳐 건너는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물살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지 않았다. 시속 3킬로미터가 넘지 않았다. 강둑은 낮았 다. 흙은 갠지스 강변의 흙처럼 푸석푸석했다. 물도 갠지스 강과 비슷 하게 모래 색이었다. 큰 나루인 크와자 살라의 강폭은 템스 강의 채링 크로스보다 넓지 않은 것 같았다 . 물론 다른 곳은 훨씬 더 넓었다. 봄에 옥수스 강의 발 원지인 파미르 고원의 눈이 녹기 시작하면 강폭이 2.5필로미터에 이 르는 곳들이 생기기도 했다. 크와자 살라에서 는 바닥이 평평한 나무 보트들이 나롯배 노릇을 했다. 보트마다 말이나 낙타를 스무 마리 태이제 겨울이라 눈 때문에 불편이 심해졌다. 사막은 종종 무릎까지 시는 진창으로 변했기 때문에 카라반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큰 애 글 먹었다. 그들은 옥수스 강을 건너고 나서 탓새 뒤에 부하라 왕국에 시우 번째로 큰 도시 카시에 도착했다. 이 도시의 열여섯 살 난 종독 다바하다르(Tora Balhacdar ) 위자는 아미르의 둘째 아들이었다. 무 트 일행은 그에게 인시사를 하려고 궁을 향해 갔다. 그들은 진 강을 헤쳐 나가이야 했는데, 진흙 밑에는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엄 T명들이 숨어 있어 사람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했다. 무어크로프트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젊은 총독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고 보고했다. "부하라 진입이 순조로울 것이라는 상서로운 조집이이 다." 그러나 무어크로트는 이 10대 총독의 매력적인 태도와 "늘떠 나지 않는 미소" 뒤에 무자비한 야땅과 사악한 본성이 감추어져 있으 을 몰랐다. 그는 나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또자 형을 죽이고 왕좌를 차 지할 뿐 아니라 영국인 장교 두 사람을 쥐가 들끊는 구덩이에 가두어 다가 궁에서 내다보이는 광장에서 참수해버린다. 1825년 2월 25일, 무어크로프트 일행의 시야에 멀리 첨탑과 동이 들어왔다. 그들은 그곳이 이슬람이 지배하는 중앙아시아 최고의 성 도(해) 부하라임을 활았다. 워낙 거룩한 곳이었기 때문에 다른 곳 에서는 빛이 하늘에서 아래로 쏟아지지만 부하라에서는 빛이 위로 비추어 하늘을 밝힌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지친 무어크로프트 일 행은 승리를 거둔 듯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캘커타를 떠난 이후로 겪은 모든 일이 합리화되는 듯했을 것이다. 무어크로프트는 그날 발 일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지난 오년 동안 궁핍과 위험을 루릅쓰 고 찾아다녔던 도시의 성문 앞에 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홍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도시로 들어서자 홍분한 아이 들은 그들을 보고 우루스 우루스" 하고 소리를 질렀다. 터시 인 러시아인"이라는 뜻이었다. 무어크로프트는 그 순간 아이들
이 이미 유럽인을 보았으며, 자신이 북쪽에서온 적들보다 한발 늦었음을 알았다. 무어크로프트는 곧 러시아인들이 적어도 사년 먼저 왔음을 알았 다. 그러나 아시아의 거대한 심장부에서는 소식이 너무 더디게 전해 져, 인도 북단에 있었던 무어크로프트나 캘커타에 있던 그의 상관들이 그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러시아인들이야 그 사실을 알리고 싶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이슬람이 지배하는 중앙아시아가 확실하 그들의 세력권 안에 있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외교와 교역을 목 하러시아 사절단은 1820년 10월 오렌부르크에서 출발했다. 사 저단은 차르가 아미르에게 보내는 아첨으로 가득 찬 편지를 들고 갔 0펴 아미르는 자국 출신의 중개인을 통해 사절단을 받아들이 기로 아소해다 러시아인들은 또 일을 쉽게 하기 위해 총과 모피, 손목시계 와 유럽산 도자기를 포함한 푸짐한 선물도 들고 갔다. 물론 부유한 부 하라 사람들이 그런 물건들을 얻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러시아의 공장들(이제 그 숫자는 5000개 정도로 노동자 20만 명을 고용하고 있었다)은 새로운 시장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국내 시장은 너무 작고 가난해서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 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반면 경쟁자인 영국은 더 고급스러 운 기계를 사용해 유럽과 아메리카 양쪽에 싼값으로 물건을 공급했 다. 그러나 러시아는 자신의 문간인 중앙아시아에 잠재력이 큰 거대 한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 시장은 워낙 외졌기 때문에 경쟁자와 마주치지 않았다. 영국이 중앙아시 아에 들어오는 것은 어떤 대가를 지르더라도 막아야 했다. 오래된 비단길의 시장들은 러시아 상품들 포만 채워져야 했다. 특히 초기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게 그레이트 게임은 정치적 군사적 팽창의 문제 만이 아니라 상업적 침투의 문제 이기도 했다. 물론 깃발-머리가 둘 달란린 제국 의 독수리-이 러시아 상품을 신고 가는 카라반을 쫓아가는 것이 그다음 순서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이것은 영국에서는 오직 무어크로프트만이 예측하고 있었 던 무자비한 과정이었다. 무어크로프트 자신이 이제 이 머나 먼 부하라에서 처음으로 그 과정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것아다. 이미 시장에는 러시아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