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말라야 고개들 북쪽, 폭풍이 몰아치는 티베트 고원에는 성산 카일라스가 우뚝 서 있다. 불교도와 힌두교도는 신비와 미신과 영원한 눈으로 둘러싸인 이 6700미터 높이의 봉우리 가만유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신앙에 헌신하는 사 람들은 기억할 수 없는 오래전 옛날부터 이 외딴 산에 가려고 목숨을 걸었다. 이 산을 한 번 돌고 오면 평생의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이야기 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에게 카일라스 주변의 황량한 풍경은 종교적인 함축물이 풍부한 곳이다. 어떤 사람들은 붓다의 발자국이 있다는 이야기도 한다. 또 목욕을 할 만한 거륙한 호수도 있고, 찾아 보아야 할 성자들의 무덤도 있으며, 명상을 하고 기도를 할 성스티간 동굴도 있고, 지친 여행자들이 쉴 수 있는 수도원도 있다. 티베트만이 아니라 몽골과 네팔, 인도와 실론(스리랑카의 |옛 이름- 옮긴이), 중국과 일본에서도 순례자들이 찾아왔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얼음 덮인 여러 고개에서 | 목숨을 잃었다. 동상이나 굶주림 때문에 죽기도 하고, 눈사태나 도적 떼 때문에 죽기도 했다. 그 리나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람들이 산을 넘어 카일라스까지 위험한 여해을 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오늘날에도 순례자들은 기도문 통 과 부적을 들고 카일라스를 찾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회개의 뜻 로 무거운 돌을 들고 성산을 돈다. 그러나 요즘에 이 누더기를 입은 순례자들은 지프를 타고 오는 서구의 관광객들과 함께 이 성스러운 땅을 돌아다녀야 한다. 서구에서 이곳을 이국적인 관광지 목록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카일라스 지역은 지구상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곳이었다.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유럽인은 극소수였다. 가장 먼저 이 곳에 들어선 사람들은 1715년에 이곳을 지나간 두 명의 예수회 사제 였다. 그들은 이 산을 무시무시하고, 황량하고, 가피르고, 몹시 춥 다고 묘사한뒤 서둘러 라싸로 갔다. 그 후 100년이 더 지나서야유 럽인이 다시 이곳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번에는 영국인 수의사였 다. 그는 동인도회사 기병대에서 쓸 말을 찾아 인도 북단과 그 너머를 뒤지고 다니며 일종의 비공식적 탐험을 했다. 그의 이름은 월리엄 무 어크로프트였다. 무어크로프트는 1808년에 말 사육장 감독으로 와 날라는 동인도회사의 초대를 받고 인도로 왔다. 그는 곧 북쪽 어던가 중앙아시아나 티베트의 황무지에 동인도회사의 말의 혈동에 활기를 참어넣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엄청난 속도와 힘을 자랑하는 종마가 있 것이라고 확신했다. 무어크로프트는 말을 찾아 세 차례 긴 여행을 떠났는데, 그 가운데 두 번째 여행(티베트의 카일라스 지역을 찾아간 여 행이었다)에서 평생 그를 따라다니게 된 강박감을 낳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티베트의 한 관리의 집에서 일어났다. 무어크로프트가 그 집에 들어서자 이상한 개 두 마리가 그를 맞이했다. 그는 랐다. 유럽 산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리는 테리어였고또한 마리는 퍼그였다. 둘다 중앙아시아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이 개들이 어디에서 왔을까 곧 무어크로프트는 답을 추측해볼 수 있었다. 이 개들은 무어크로프트가 영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흥분하여 그에게 달려들어 할고 짖은 것이 분명했다. 이어 한참을 달래자 두 개는 군사 훈련으 받은 듯한 행동 을 보여주었다. 무어크로프트에게 이것은 한 가지를 의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두 마리의 개는 원래 군견이었다. 마을 사 람들은 러시아 상인들에게서 얻었다고 말했지만, 무어크로프트는 생 각이 달랐다. 어쨌거나 이 것은 러시아인들이 이미 그곳에 온 적이 있 다는 중거였다. 그때부터 1825년에 죽을 때까지 무어크로프트는 캘 커타의 상관들에게 열떤 목소리로 러시아가 중앙아시 아에서 벌이려 는 일에 관해 줄기차게 경고를 했다. 무어크로프트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중앙아시아의 거대한 미개 척 시장을 장악하려 한다고 확신했다 . 동인도회사는 투르키스탄과 티베트의 원주민이 "러시아의 옷김감으로 옷을 해 입게 할 것인지 아니 면 영국 옷감으로 웃을해 입게 할 것인지," 철기를 상트페테르부르 크에서 사게 할 것인지 버밍엄에서 사게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더 나아가 무어크로프트는 러시아가 정복을 꾀하고 있다고 믿었다. 우선은 중앙아시 아의 한국들이 그 대상이었고, 그 다음에는 인도다. 무어크로프트는 상관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소수의 영국인 장 교들이 원주민 비정규군을 지휘하여 높은 곳에서 거대한 바위를 굴 리는 것만으로도 고개들을 통과해 남진하는 러시아 군대 전체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영국과 인도 양쪽 인도 양쪽 모두 러시아 공포중환자들은아직 소수에 불과했으며, 이들은 정부에서도 동인도회사에서도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실제로 러시아 공포증의 아버지라할 만한 로버트 윌슨 경과 무어크로프트는 서로 견해가 비슷했지 만 서신을 주고 받기는커녕 서로의 이름조차 들어본 일이 없었을 것 이다. 동인도회사의 책임자들은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영국의 동맹국 인 러시아가 인도에 흑심을 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첫째가는 중요한 목표는 무어크로프트가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히망 라야 산맥과 그 너머에서 새로운 영토를 얻는 것이 아니라 기왕에 언 은 영토를 보호하고 공고하게 다지는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비용 이 많이 들어갔다. 따라서 상관들은 무어크로프트의 경고가 건전한 판단보다는 과도한 열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치부하여 무시해버렸다. 그가 보낸 보고서들은 그냥 동인도회사의 문서 보관소에 처박아두고 읽지도 않았다. 그 서류들은 무어크로프트가 죽은 뒤에야 빛을 보게 된다. 말을 찾아 돌아다니던 무어크로프트에 게는 중앙아시아 한국들 가 운데 가장 부유한 나라의 수도이자 위대한 카라반의 도시인 부하라 에 가보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 그곳의 시장에 가면 회사의 말사육장 에 필요한 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는 그런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무어크로프트가 찾는 말은 전설적인 투르크멘 말로, 오래전부터 인도 북부의 시장에서 그 속도 와 힘과 기 동성에 관해서는 많이 들었다. 1819년 봄 그의 집요한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3200킬로미터 탐험 승인이 떨어지고 자금까지 제공되었던 이것이 무어 크로프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탐험이었다 . 그 무어크로프트는 히바로 떠나던 러시아의 무라비요프와 마찬가 지로 아무런 공식적 지위를 부여받지 못했다. 따라서 곤경에 처하거나 인도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를 찾아가는 바람에 상트페테u 부르크를 자극하여 항의가 들어올 경우에도 영국 정부나 동인도회사는 관련을 부인할 수 있었다. 말을 구입하는 것은 무어크로프트의 목적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북쪽 끝 지역에 영국 상품을 파는 시장을 열어 비슷한 목적 을 가진 러시아를 앞지를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1820년 3월 16 일에 동인도회사가 장악한 영토를 벗어난 무어크로프트 일행의 뒤에는 대규모 카라반이 천천히 따라왔다. 이들은 도자기에서 권총, 그리 고 식기에서 면화에 이르기까지 가장 훌륭한 영국산 수출품들을 가 득신고 있었다. 그들은 한참 품질이 떨어지는 러시아 제품들보다 돈 보이는 물건들만 골라서 신고 왔다 . 옥수스 강을 건너는 이 장거리 원 정에는 수많은 상인이나 하인들과는 별도로, 조지 트레벡(George Trebedk)이라는 이름의 젊은 영국인과 조지 거스리(George Guthre) 라는 이름의 영국계 인도인이 무어크로프트를 따라왔다. 이 두 사람 은 결국 유능하고 믿을 만할 뿐 아니라. 어떤 난관에서도 변함이 없는 친구임이 확인된다. 이들 가운데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미지의 세계를 돌아다니는 이들의 여행은 자주 또 오래 지체를 하는 바람에 무려육년이나 걸리고,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