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페르시아가 캅카스에서 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코 사크 부대의 전진은 멈추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탐욕스러운 눈길을 중앙아시 아로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협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차르와 샤 모두 1813년 영국의 중재로 체결한 굴리스탄 조약 을 다음 판에 다시 만니기 전에 힘을 기르기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샤는 승리한 러시아에게 넘겨준 실지를 회복하고 싶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적당한 때가 오면 페르시아와 접한 남 국경 너머로 밀고 내려가 그대로 눌러앉을 생각이었다. 결국 무어 크로프트가 죽은 지 일 년이 지나지 않아 . 두 이웃은 다시 전쟁에 돌 김했다. 페르시아가 러시아군에 게 짓밝히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던 영국은 당황했다. 전쟁이 벌어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조약의 문구 를 둘러 싼 분쟁이었다. 예레반과 세반 호수 사이의 땅이 누구에게 속한 것인 문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 를 해결하려고 러시아의 칼카스 총독 예르몰로프 장군과 페르시아의 황태자 아바스 미르자사이에 회담이 열렸다 . 그러나 회담이 결렬되면지, 1825년 119 예르몰 로프의 군대가 분쟁 지역을 점령했다. 페르시아는 철수를 요구했지만 예르몰로프는 거부했다. 샤와 그의 백성들은 격분하였으며 이 도 러시아에 대항한 성전에 참가하려는 병사들이 전국에서 아바시 끼르자의 짓발 아래로 모여들었다. 페르시아는 러시아가 아직 전쟁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사 트페테르부르크는 터카키로부터 독립하려는 그리스의 투쟁에 말려들 어 있었다. 게다가 1825년 12월에 차르 알렉산드르가 급사하면서 다 른 어느 곳보다도 특히 군대에 심각한 무질서가 찾아왔다. 아바스미 르자는 그 무렵 터키와 싸워 거둔 승리에 고무되어 러시아가 무방비 상태일 때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갑자기 경고도 없이 페르시아의 3만 대군이 러시아 국경을 넘어 파죽지세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러지 아연대 하나가 통째로 포로가 되었다 . 과거 샤에게 속했던 중요한도 시들도 되찾았다. 페르시아의 비정규군은 예르물로프의 갑카스 사랑 부인 티플리스의 관문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 의기 양양해진 페르시야 인들은 카스피 해 연안에 있는 큰 요새 렌코란까지 수복했다. '갑카스의 사자'로 알려진 예르몰로프는 그 길고 찬란한 경력에서 처음으로 기습을 당해 완패하고 말았다. 약이 오른 상트페테르부로 . 비난했다. 아바스 미르자의 군크는 런던이 페르시아를 선동했다.고 비난했다. 대에서 영국인 장교들이 고문관으로 일한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부는 심지어 포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새로운 차르 니콜 라이 1세는 즉시 예르몰로프의 지휘권을 . 박달하고, 당시 가장 똑똑한 젊은 장군으로 손꼽히던 파스키예비치(Paskievich) 을 후임자로 선정했다. 그러나 비록 상관들의 신임은 잃었을지언정 늙은 '사자에 대한 부대원들의 존경과 애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들은 패배가 상트페테르부르크
탓이라고 여겼다. 예르몰로프가 자기 마차에 올라타 티플리스를 떠날 때는 많은 부하들이 소리 내어 울었다. 파스키예비치는 .지원군의 도움을 얻어 싸움의 흐름을 돌려놓았다. 오래지 않아 .아바스 미르자는 연거푸 패배를 했으며, 결국 현재 아르 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을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니콜라이는 승리 를 기념하려고 파스키예비치를 예레반 백작 으로 임명했다. 페르시 아를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파스키예비치는 그 보답으로 니콜라이에 게티무르가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진 검(페르시아의 장군에 게서 빼앗은 것이었다)을 선물했다. 샤는 다급하게 그 무렵 조인한 방위협정에 의 거해 동맹자 영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런던은 무척 당황했다. 군사적 인 관점에서 보자면 영국은 도울 입장이 못 되었다 . 갑카스 내에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국은 여전히 공식 동맹자인 러시아의 일에 얽혀들고 싶지 않았다. 런던의 입장에서 볼 때 테헤란과 협정을 맺은 원래의 목적은 페르 시아를 건너오는 침략자로부터 인도를 보호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월슨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경 고에도 불구하고 당장 그런 일이 일 어날 위험은 없는 것 같았다. 영국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이협정에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이 협정에 따르면 그들은 샤가 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그를 지원할 의무가 있었다. 샤가 공격을 할 경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비록 샤가 수도 없이 도발과 수모를 겪었 하지만, 법적으로 보자면 어쨌든 공격자인 것은 분명했다. 굴 리스탄 조의에서 합의했던 국경을 넘은 사람은 샤였기 때문이다. 따 라서 영국은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2년 만에 두 번째였다. 그러나 페르시아만이 아니라 동양 전역에서 그들의 평판은 큰 손상을 입었다. 곧 영국은 러시아를 너무 겁내 친구도 톱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더 걱정스러운 일은 러시아도 그렇게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페르시아는 동맹국 영국으로부터 예상했던 도움을 얻지 못하자 시한번후전을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에게는 다행스럽제 도, 러시아는 당시 터키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며 1828년 투르크만치에서 맺은 항복 협정은 활씬 더 가혹했을 것이다 어쨌든 차르 니콜라이는 예레반과 나키체반 등 부유한 주들을 자신 의 제국에 영구적으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페르시아는 강대국들의 정책만이 아니라 영국의 교활함에 관해서도 씁쓸한 교훈을 얻었다. 런던은 샤에게 자금 이 간절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상당한 돈을제 공하면서, 샤가 공격을 당할 경우 영국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무조 항마저 포기하라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페르시아에 대 한 영국의 막대한 영향력은 순식간에 증발해버리고, 영국의 자리는 러시아가 차지하게 되었다 . 페르시아는 이제 북방 의 거대한 이웃의 실질적인 보호국이 되었다 . 러시아는 페르시아의 어느 곳에나 원하는 대로 영사를 둘 수 있었으며, 러시아 상인은 특권을 누렸다. 1828년 겨울 새 러시아 대사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Aleksandr Giboedo)가 테헤란에 도착했다. 테해란은 새 대사 와 그의 정부어 적대감을 느꼈지만 정중한 공식 행사로 대사를 맞이했다. 그리보예 도프는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한 저명한 문인이고 한때 예르몰로프의 정무비서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페르시 아와 굴욕적인 항복 조건들을 협상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제 엄청난 전쟁 배상금 지불을 포함 하여 항복 조건들의 충실한 이행을 감독하는 것이 그리보예도프의 입무가되었다. 종교적인 광신자들에게는 그들의 도시에 그리보에도 프가 있다는 것 자체가 분노의 원인이었다. 게다가 그가 1829년 1월, 고로하 달인 무하림람(Muharam)에 테헤란에 도착한 것도 불행한 입 이었다. 감정이 복받친 테헤란의 신자들은 검으로 자해를 하고 불이 오 순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이런 식으로 이교도 러시아인들에 대 하증오는 발화점에 이르렀다. 여기에 불을 댕긴 사람은 바로 그리보 예도프 자신이었다. 강화조약에 따르면 이제 페르시아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원할 경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의 고향은 러시아 제국의 일 부가 되어 기독교적인 통치를 받았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려는 사람들 가운데는 샤의 하렘에 고용된 환관과 샤의 사위의 하렌에 있는 젊 은 여자 둘도 있었다. 이들 셋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으며, 그리 보예도프는 이들을 보호하면서 고향으로 보낼 준비를 해주었다. 샤는 그 소식을 알게 되자 즉시 그리보예도프에게 세 사람을 돌려달라 고 요청했다. 그리보예도프는 차근의 외무장관인 네셀로데 백작만이 에 예외를 둘 수 있으므로, 사의 요청을 외무장관에 게 전달하겠 다면서 세 사람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것은 용감한 결정이었다. 그들 단러보내기만 하면 관계가 훨씬 더 좋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러나 그리보예도프는 그 사람들을 돌려보내면 그들이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너무 잘 알았다. 그렇잖아도 혐오하던 이교도가 자신들의 군주를 모욕했다는 소문 빠르게 퍼졌다. 물라들은 시장을 폐쇄하라고 명령하고, 사람들을 모스크로 불러 모았다. 그들은 모인 사람들에게 리시아 공사관으로 행진하여 그곳에 피신한 세 사람을 잡아 오라고 명령했다. 곧 수천 명의 구중이 모여, 공사관을 둘러싸고 러시아인들의 피를 보겠다고 소리를 질렸다. 시간이 갈수록 군종의 수는 불어났다. 그리 보예도프는 공사관을 지키는 소수의 코사크 경호대로는 그들을 절대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 모두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리 보예도프는 내키지 않았지만 아르메 니아인들을 돌려보내기로 결정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몇 분 뒤 물라의 부추김을 받은 군중이 건 물안으로 밀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