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년 여름 그루지야의 수도 티플리스(당시 캅카스의 러시 아군 사령부가 있었다), 새로 지은 러시아정교 예배당의 조용한 한쪽 구석에서 제복을 입은 한 젊은 장교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 장교는 그날 거기에 있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창조주에 게 물어볼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스물네 살의 하일 니콜리라예비치 무라비요프 대위는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살 행위라고 생각하는 임무를 수행하러 떠날 참이었다. 예르몰로프 장군의 명령을 받아 투르크멘 부족민으로 변장을 하고, 1717년의 불운한 원정대가 갔던 그 위험한 길을 따라 동쪽으로 13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히바로 가려는 것이었다. 법을 아랑곳하지 않는 적대적인 투르크멘 사람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잡혀서 노예로 팔리지 않고 황량한 카라쿱 사막을 건너는 데 성공한다면, 히바의 칸에게 푸짐한 선물과 더불어 예르몰로프가 보내는 신교의 메시지를 전할 예정이었다. 러시아는 100년 동안 아무 접촉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이 한국과 동맹을 맺는 길을 뚫으려 했다. 예르 몰로프의 미끼는 교억이었다. 칸에게 유럽의 사치품과 러시아의 과학 기술로 만든 최신 제품을 얻을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고전적인 그레이트 게임 전략으로, 러시아인들은 앞으로도 되풀이해 이 전략을 사용하게 된다. 사실 예르몰로프는 적당한 순간이 오면 합병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었다. 따라서 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무라비요프의 임무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물론그것만으로도 위험했다. 히바의 통치자는 그 나라 백성만이 아니라 주위의 투르크멘 부족들까지도 겁을 먹는 아 제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라비요프는 첫 번째 임무보다 활씬 더 위험한 또 하나의 임무를 말았다. 가는 길에 우물의 위치와 깊이에서부터 칸의 군대의 규모와 군사적 능력에 이르기까지 히바의 방어력에 관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세발하게 관찰하 여 몰래 기록하는 임무였다. 그는 또이 한국에 관한 경제 정보도 최대한 수집할 예정이었다. 그래야 그 전설적인 부에 관한 진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 외딴 중세 왕국의 또 한 가지 면에 관심 을 가졌다. 오 랜 세월에 걸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러시이인 다수 가 히바와 무 하라에 번창하던 노예 시장에서 팔려 평생을 굴레에 묶여 살았다. 원래는 1717년 원정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제는 오렌부르크 근처의 키르기스 부족들에 게 납치되거나 불잡힌 군인이나 정착민, 또는 카스피 해 연안에서 투르크멘 사람들에게 불잡힌 어부와 그 가족들이더 많았다. 그들이 그들이 어떤 곤경에 처했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탈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들에 관하여알수 있는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 것이 무라비요프의 마지막임부였다. 에르몰로프는 입무를 맡길 사람을 신중하게 선택했다. 부라비요프 는 장군의 아들이었으며, 네 형제 모두 장교로 근무했다 . 그는 이미 탁월한 능력과 기지를 보여주었다. 불과 열일곱 살이던 소위 시절에 -나폴레옹과 싸운 전쟁 수훈 보고서에서 다섯 번이나 이름이 언 급되었다. 그러나 에게는 이 임무에 딱 맞는 다른 자격도 있었다. 그가 훈련받은 군 측량 기사였을 뿐 아니라 비밀 여행 을 여러 번다닌 적도 있다는 점이었다. 한번은 가짜 신분증을 들고 이슬람순 레자로 변장하여 페르시아 국경 너머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따라서 무라비요프는 군인의 눈으로 지형지물을 볼 수 있을 뿐 이아니라,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예르몰로프는 그가 실하여 히바 사람들이 그를 감옥에 가두거나 노예로 팔거 처형을 할 경우에도 러시아 정부는 관련이 없다고 부인할 것임을 분명히 밝혀두었다. 그를 구출할 방법도 없을 뿐더러, 차르가 일개 중앙아시아 통치자에게 체면이 깎이는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무라비요프에게는 또 한 가지 특질 이 있었기 때문에, 예르몰로프는 칸에게 그것을 유감 없이 발휘하라 고 말했다. 그것은 그의 특별한 친화력이었다. 게다가 그 지방 여러 언어에 유창하다는 점도 또 하나의 장점이었다 . 장군은 이렇링게 말했 사메는 타타르 언어를 잘알 뿐 아니라 사람들이 자네를 좋아하기 만드는 등력이 있으니 아주 편할 걸세, 아침의 기술을 유럽인의 관점애서 보지 말게. 아시아인들은 :늘그 기술을 사용하니, 지나치지나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네. 무라비요프는 떠나기 전날 저녁 저녁 예배당에서 기도를 했다. 아마 살 아돌아와 여행 이야기를 하게 될능성은 적다고 보았을 것이다. 칸이몇년 전 보낸 서신에서 히바에 접근하는 러시아 사절은 .좋지 않 은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예르폴로프는 이 일을 잘 해낼 사람이 있다면 똑똑한 젊은 장교 무라비요프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라비요프는 티플리스를 떠나고 한 탈 뒤, 러시아의 바쿠에서 전 함을 탔다. 그는 해안의 요새 렌코란에 잠깐 들렀다가 카스피 해 동 의 거칠고 황량한 땅으로 건너갔다. 무라비요프는 이곳에서 몇 주 문떠 여러 곳에 홀어진 투르크멘 정착민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래두 이곳에서는 러시아의 해군 과 대포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 처음에 투르크멘 사람들은 겁을 먹고 의심을 했다. 그러나 족장들에게 선물 을 하면서 서서히 그들의 신뢰를 얻어갔다. 마침내 금 40두카트를 내 면곧 변덕스러운 카라쿰 사막을 건너 히바로 갈 예정인 카라반과 동 행하게 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돈의 반은 출발할 때내 고 나머지 반은 무사히 러시아 군함으로 돌아온 뒤에 주기로 했다. 무라비요프는 자피르 베이 부족에 속한 투르크멘 사람 무라드 베그 (Murad Beg)로 변장하고 여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돈 가 라반에 속한 사람들은 그가 선물과 중요한 메시지를 들고 히바의 을 찾아가는 러시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변장을 한 것은 사막에 숨어 있는 습격자들이나 노예 상인들로부터 선물과 목숨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무라비요프는 가운 안에 권총 두 자투와 단검을 감췄다. 9월 21일 카라반은 열일곱 마리의 낙타(그요프의 것이었다)를 끌고 카라쿨 사막으로 . 가운데 네 마리는 무라비 상인들도 합류했다. 결국 그들의 숫자는 사람 40명. 들어갔다. 가는 길에 다른 낙타 200파리로 불어났다. 무라비요프는 이렇게 기록했다.. "더위는 심했지만 견딜 수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사막은죽음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생명 의혼적은 전혀 없었다. 모래밭 여기저기에 산재한 덤불들이 살 려고 애를 쓰고 있을 뿐이었다." 무라비요프는 늘 노에 상인들에 대 한 공포에 시달렸지만 여행은 대체로 무사히 진행되었다. 이제 히바 가 불과 닷새 거리로 다가왔다. 그들은 낙타 1000마리에 사람 200명 이루어진 대규모의 카라반이 지나가도록 결음 을 멈추고 기다런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바람에 무라 비요프는 감짝 놀랐다. 곧몇 사람이 무라비요프를 둘러싸고, 무라비 유프의 카라반 사람들에게 이 시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들은 무라 비요프의 변장이 들통 났다는 것을 깨닫고, 아주 침착하게 그는 그들 이 붙잡은 러시아 사람으로, 지금 히바로 팔러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 다. 다른 카라반 사람들은 축하를 하면서, 자기들도 방금 히바에서 러시아인 세 명을 좋은 값에 팔아님겼다고 말했다. 무라비요프는 수도가 50킬로미터 거리로 다가오자 두 사람을 먼저 보냈다. 한 사람은 하바로 보내 칸에게 자신이 간다는 소식을 알렸 다. 또 한사람은 비슷한 메시지를 들고 가장 가까운 곳의 군 지휘관 에게 갔다. 혹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터무니 없는 소문이 자기보다. 번저 도착합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1717년의 교활한 대 각찰을 복수하러 온 군대의 전위대라는 생각이라도 하게 되떤 큰일 치다. 사막을 벗어나 수도를 들러싼 오아시스로 들어서면서 우라비요프는 마을들이 매우 유족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잘 자라는 작물 들로 덮인 들판은 어제까지 보았던 모래만 덮인 황무지와 완전히 달랐다." 그러면서 무라비요프는 유럽에서도 그렇게 잘 가꾸어진 땅은 본 적이 없다고 가는 길은 과실수들로 덮인 외로움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