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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니어의 침략 경로 연구가 보여주는 잠재력

짜짱면 2026. 1. 13. 12:52

침략군이 어떤 길을 택하든 간에 결국 모두 아프가니스탄을 통과해야 했다. 심지어 러시아도 캅카스의 새로운 요새로부터 출발하든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에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첫 번째 경우라면 러시아는 페르시아 전체를 행군하여 관통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통제하는 카스피 해를 이용하여 건너편 동쪽 해안으로 이동한 다음 옥수스 강까지 행군할 수 있다. 이 강을 이용하면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발흐까지 배를 타고 갈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을 건넌 후에는 카이베르 고개를 통해 인도에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은 히바 원정대의 대량 학살로 끝난 꿈이긴 하지만 표트르 대제가 인도의 무굴 통치자들과 접촉하기 위해 사용하려 했던 길이기도 했다. 키니어는 이 길의 무시무시한 난관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원정대가 겪은 곤경과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는 그가 죽고 나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인 1873년에야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번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페르시아와 터키 제국의 범위를 벗어나면 키니어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도 카스피 해의 동해안과 옥수스 강 사이의 지역에 관하여 믿을 만한 정보를 얻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키니어는 중앙아시아를 횡단하려는 군대에게는 보급이 엄청난 문제가 될 것임을 인식했다. 과거 타타르 평원 출신의 큰 무리들은 남쪽의 더 문명화된 왕국들을 침략할 때 보통 가축 떼와 더불어 먹을 것을 가지고 다녔다. 그들은 또 근대 전쟁에 필요한 중장비 운반의 부담도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유럽의 병사들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속도로 행군할 수 있었다. 러시아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렌부르크로부터 진격하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거대한 초원 지대의 남쪽과 동쪽을 돌아다니는 호전적인 카자흐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기지로 1737년에 오렌부르크 요새를 건설했다. 이렇게 되면 남쪽으로 부하라까지 1600킬로미터를 행군하고 다시 사막을 가로질러 오랫동안 행군한 뒤에 옥수스 강을 건너 발흐로 가야 했다. 키니어는 이 길에 러시아인들에게 적대적이며 살인을 일삼는 부족들이 들끓는다고 말했다. "따라서 러시아가 이쪽에서 우리를 침략하려면 먼저 타타르 사람들을 쳐야할 것이다." 키니어는 그런 일이 있기 전에는 인도가 북방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다. 묘하게도 키니어는 아프가니스탄을 건너는 것을 가장 어려운 일로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침략군은 지친 부대만이 아니라 포병, 탄약을 비롯한 다른 중장비를 이끌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야 할 뿐 아니라 외국인을 몹시 싫어하는 호전적인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사는 땅도 통과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키니어처럼 정보를 갖춘 사람들조차 인도 북부를 둘러싼 거대한 산맥과 사람들을 거의 알지 못했다. 위대한 히말라야 탐험가들의 시대는 아직 멀었다. 키니어는 윌슨과는 달리 차르 알렉산드르가 인도를 점령할 계획을 품고 있다고 확신하지는 않았다. "러시아는 절대 이쪽으로 제국을 확장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다. 러시아는 이미 너무 거대하여 아마 오래지 않아 스스로 축적한 무게 때문에 박살이 나고 말 것이다." 키니어는 알렉산드르의 야심의 표적은 콘스탄티노플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차르가 자기 자신의 위험이나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인도의 영국인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싶다면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예측할 수 있기는 했다. 페르시아의 늙은 샤가 죽으면 러시아는 페르시아를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한다 해도 왕위를 좌우할 기회는 얻게 될 터였다. 키니어는 샤의 아들 40명 가운데 왕좌에 눈독을 들이지 않는 아들은 한 명도 없다고 썼다. 그들 가운데 거의 반수가 지방이나 도시의 통치자로서 자신만의 군대와 화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이 경쟁하는 왕자들 가운데 한 사람을 지지한다면 그 뒤에 불가피한 혼란이 이어지는 동안에 "러시아 부대의 우월한 기술과 규율 덕에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을 왕좌에 앉힐 수 있을 것이다." 일산 샤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면 약탈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한 페르시아인들을 선동하여 인도까지 행군하게 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지금 샤의 조상인 나디르 샤도 공작 왕좌와 고어누 다이아몬드를 그런 식으로 얻은 것 아닌가? 러시아 장교들은 침략 계획만 세워주고 자신들의 부대는 개입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면 차르는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었다. 키니어의 신중하고 자세한 침략 경로 연구는 앞으로 빛을 보게 되는 공식/비공식의 이런 수많은 평가들 가운데 첫째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연구에서 주위 지역의 지도 가운데 빈 부분은 차츰 채워지지만 키니어가 고려했던 통로들은 대부분 약간만 바뀐 채 계속 되풀이하여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나폴레옹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러시아 침략의 공포가 커지면서 초점이 점차 북쪽으로 페르시아로부터 중앙아시아로 옮겨지게 된다. 그와 더불어 침략자가 통과해야 할 통로인 아프가니스탄이 영국령 인도 방어에 책임을 진 사람들의 마음에 점점 더 크게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미래의 일이다. 윌슨의 충격적인 논문이 촉발한 열띤 논쟁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국의 공식 동맹국인 러시아가 영국에 악의를 품거나 인도를 침략할 계획을 세울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어쨌든 일시적이라고는 하여도 러시아의 페르시아 남진은 영국의 외교력으로 막아냈고 이것으로 런던은 상당히 만족해하였다. 그러나 키니어가 그런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러시아의 캅카스 군단 사령관 알렉세이 예르몰로프 장군은 탐욕스러운 눈으로 카스피 해 건너 동쪽의 투르키스탄을 바라보고 있었다. 꼭 100년 전 러시아인들이 히바인들의 계략에 넘어가 참패를 당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바야흐로 이후 50년 동안 중앙아시아의 커다란 한국들과 카라반 도시들을 차르의 손에 움켜쥐는 과정의 첫걸음을 머뭇머뭇 내딛으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