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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틀리아렙스키에게 참담한 패배를 맛본 페르시아

짜짱면 2026. 1. 11. 01:35

러시아가 캅카스 땅을 콘스탄티노플, 더 나아가 테헤란으로 진격하기 위한 도약대로 사용할 것이라고 두려워한 사람은 윌슨만이 아니었다. 터키와 페르시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입하기 직전인 1811년 여름, 그들은 오랜 경쟁 관계를 청산하고 함께 이교도 침입자와 싸운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알렉산드르가 국내의 필요 때문에 캅카스에 있던 군대를 철수시키자 전망은 밝아 보였다. 남은 러시아 군대는 사상자를 많이 내기 시작했다. 어떤 전투에서는 페르시아군이 러시아 연대 전체의 항복을 받아내고 깃발까지 빼앗기도 했다. 러시아군에게는 전례가 없는 모욕이었다. 한 논평자는 이렇게 말했다. "페르시아 궁정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갈 것이다. 이제 러시아는 무적이 아니었다." 적어도 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샤는 앞으로도 계속 승리를 거두어 잃어버린 땅을 모두 회복하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러나 곧 그런 희망은 물거품처럼 꺼지고 말았다. 나폴레옹과 사활을 건 싸움에 말려든 알렉산드르는 필사적인 심정으로 샤가 동맹자라고 생각했던 터키 술탄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모든 전투를 끝내는 대가로 터키인들에게 그 전 몇 년 동안 빼앗았던 땅을 거의 모두 돌려주기로 약속했다. 알렉산드르로서는 고통스러운 결정이었으나 그 덕분에 캅카스의 몹시 약해진 군대는 간절히 원하던 휴식을 얻었고 이제 모든 노력을 페르시아와 싸우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전에 샤의 군대에 당한 수모를 잊지 못하는 러시아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 기회는 머지않아 찾아왔다. 1812년 어느 달 없는 밤, 불과 스물아홉 살의 젊은 장군 코틀리아렙스키가 이끄는 소규모 러시아 부대는 몰래 아라스강을 건넜다. 알렉산드로스 대제 시대에는 아락세스 강이라 불리던 이 강은 현재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 역할을 한다. 강 건너편에는 샤의 고집 센 아들이자 상속자 아바스 미르자가 이끄는 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은 숫자는 훨씬 많았지만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바스 미르자는 약화된 러시아군에게 거둔 이전의 승리와 러시아군이 그를 몹시 두려워한다는 보고에 도취해 있었다. 미르자는 자신만만했기 때문에 강을 감시할 전초를 세우라는 영국의 두 고문관의 경고를 무시했다. 심지어 전에 세웠던 초소마저 철수시켰다. 이곳의 고문관 가운데 한 사람은 전에 포팅어 중위와 함께 여행을 했으며 이제 보병 전문가로서 페르시아군에 배속된 크리스티 대위였다. 또 한 사람은 키가 2미터가 넘는 육중한 몸집의 포병 장교 헨리 린지 중위였다. 페르시아군은 린지 중위를 그들의 전설적인 영웅인 위대한 루스툼에 비교하고는 하였다. 이제 영국과 러시아는 나폴레옹에 대항하여 싸우는 동맹자 관계였기 때문에 맬컴 고문단의 구성원들은 적대 행위가 벌어질 경우 정치적으로 불편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에 대비하여 배속된 부대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워낙 빠르게 기습을 했기 때문에 크리스티와 린지는 명령을 무시하고 페르시아군과 함께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그 사이에 페르시아군에 애착을 갖게 되었고 그들의 눈에 도망치는 것으로 비치고 싶지 않았다. 두 고문관은 필사적으로 부대를 독려했고 그 덕에 하루 동안 러시아군의 격렬한 공격을 버텨내고 심지어 몰아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 코틀리아렙스키의 부대는 어둠을 틈타 다시 공격을 해왔고 페르시아군은 혼란에 빠져 자신들끼리 사격을 했다. 아바스 미르자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부하들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크리스티가 이 명령을 무시하자 아바스는 직접 말을 타고 달려가 깃발을 뽑은 다음 부하들에게 퇴각하라고 다시 소리쳤다. 그 후에 이어진 혼란 속에서 크리스티는 러시아군의 총에 목을 맞고 쓰러졌다. 역시 맬컴 고문단의 구성원이었던 윌리엄 몬티스 중위의 말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은 크리스티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크리스티가 직접 길러내고 훈련시킨 대대의 반 이상이 그를 전장에서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다가 죽거나 다쳤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쓸모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러시아 순찰대가 치명상을 입고 누워 있는 영국군 장교를 발견한 것이다. 크리스티는 산 채로 포로로 잡히는 일은 피하겠다고 결심했다. 몬티스는 그렇게 전한다. 명령 불복종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된다면 이렇게 말할 작정이었다고 한다.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라 싸우려고 명령에 불복종했습니다." 엄청난 힘의 소유자인 크리스티는 자신을 일으키려던 러시아 장교를 바로 베어버렸다. 곧 중상을 입고 전장에 누워 있는 영국인 장교가 항복을 거부한다는 보고가 코틀리아렙스키에게 올라갔다. 코틀리아렙스키는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반드시 생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몬티스는 말한다. "크리스티는 안간힘을 쓰며 저항했다. 그는 여섯 명을 죽인 후에야 끌려가 코사크 병사에게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나중에 고문단의 영국인 의사가 그의 주검을 발견하여 그 자리에 묻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가장 용맹하면서도 매우 온화한 장교가 땅에 묻혔다. 몬티스는 그렇게 말을 맺었지만 러시아군은 크리스티와 잠깐 만났을 때 그에게서 온화한 모습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바스 미르자의 자기도취 때문에 그의 부대는 기습을 당해 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러시아군의 피해는 사병 124명과 장교 3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코틀리아렙스키는 페르시아군을 전멸시킨 것만이 아니라 린지 중위의 귀한 총 12정도 노획했다. 그 총에는 각각 왕 중의 왕이 샤 중의 샤에게라고 새겨져 있었다. 러시아로서는 예전의 패배를 충분히 앙갚음한 셈이었다. 코틀리아렙스키는 이제 의기양양하게 눈을 헤치고 카스피 해를 향해 동진했다. 그곳에는 페르시아의 단단한 요새 렌코란이 있었다. 테헤란에서 불과 500킬로미터 거리인 렌코란은 그 무렵 영국 공병대가 근대적인 방식으로 재건했다. 페르시아 방어군은 이 요새가 어떤 공격도 막아낼 수 있다고 믿고 항복을 하라는 코틀리아렙스키의 권유를 무시했으며 상당한 인명 손실을 보면서 첫 번째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코틀리아렙스키가 선봉에 선 러시아군은 닷새간의 유혈이 낭자한 전투 끝에 방어선을 뚫는 데 성공했다. 페르시아군은 명예롭게 항복하라는 권유를 거절했기 때문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코틀리아렙스키도 병력의 3분의 2를 잃었다. 코틀리아렙스키 자신도 그의 공병대가 성벽에 뚫어 놓은 틈 밑에 쌓인 러시아군과 페르시아군 시체 더미 속에서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고 반쯤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나중에 코틀리아렙스키는 병상에서 알렉산드르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방어군의 완강한 저항에 병사들이 몹시 화가 나 총검으로 페르시아군 4000명을 남김없이 죽였습니다. 적군은 장교 한 사람, 병사 한 사람도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코틀리아렙스키 장군도 부상이 너무 심해 다시 전장에 나서지 못했다. 그는 캅카스의 러시아군 전체의 지휘권을 맡아달라는 차르의 제안을 아쉽지만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록 값비싼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코틀리아렙스키는 승리한 덕분에 차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상을 받았다. 누구나 탐내는 상트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영국의 빅토리아 십자훈장에 견줄 수 있다. 코틀리아렙스키는 이 상을 두 번째 타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젊은 나이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세월이 흐른 후 죽음을 눈앞에 둔 코틀리아렙스키는 가족을 모두 불러 늘 직접 가지고 다니던 하나뿐인 열쇠로 작은 상자를 열었다. 그는 감경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내가 차르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차르와 조국을 위해 싸우지 못한 이유다." 코틀리아렙스키는 상자에서 무려 마흔 조각의 뼈를 하나하나 꺼냈다. 러시아 군의관이 오래 전 그의 박살난 두개골에서 끄집어낸 것이다. 코틀리아렙스키에게 두 번이나 참담한 패배를 당한 페르시아는 이제 싸울 용기를 잃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외교적 수단으로 러시아의 진격을 막고 싶어하던 영국이 휴전을 중재하자 샤는 얼른 제안을 받아들였다. 러시아 역시 숨을 돌리고 힘을 다시 비축할 기회를 반겼다. 게다가 그들은 승자로서 협정 조항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페르시아로부터 빼앗았던 영토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렇게 해서 1813년 굴리스탄 조약이 체결되었고 샤는 아라스강 이북의 거의 모든 영토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샤는 그루지야와 바쿠에 대한 소유권만이 아니라 카스피 해에서 군사적 활동을 할 권한도 포기했다. 그 결과 카스피 해는 러시아의 호수가 되었고 차르의 군대는 인도 북쪽 국경으로 400킬로미터 더 다가오게 되었다. 만일 조약을 맺지 않았다면 차르의 군대가 가차없이 페르시아 안으로 밀고 들어왔을 것이다. 아무튼 이 조약으로 샤가 얻은 것은 전쟁의 종결 외에는 혹시 분란이 생기더라도 자신의 아들이자 법정 추정 상속인인 아바스 미르자가 페르시아 왕좌를 계승하도록 뒷받침한다는 차르의 약속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