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눈부신 부는 늘 탐욕스러운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영국인들이 도착하기 오래 전부터 인도의 통치자들은 늘 침략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다. 그런 침략은 동인도회사가 유럽의 경쟁자들을 몰아내기 약 3000년 전 아리아인이 북서쪽 고개들을 넘어올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파도처럼 연속적으로 밀려와 원주민을 남쪽으로 밀어냈다. 그 뒤로 크고 작은 침략이 여러 차례 뒤따랐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는 기원전 500년 경에 침입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그로부터 200년 뒤에 침입했다. 그러나 둘 다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997년부터 1026년 사이에는 위대한 이슬람 정복자 가즈니의 마무드가 인도 북부를 무려 15번이나 습격하여 그때 가져간 엄청난 약탈물로 자신의 수도를 장식했다. 구르의 무함마드는 가즈니를 정복하고 나서 1175년에서 1206년 사이에 인도를 여섯 번 침입했으며 그의 장군들 가운데 한 사람이 델리의 통치자가 되었다. 1398년 티무르의 부대가 델리를 약탈한 뒤 역시 중앙아시아의 전사인 터키인 바부르가 카불에서 인도를 침략했으며 1526년에는 무굴 제국을 세워 델리를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아시아인 침략자는 아니었다. 1739년에는 페르시아의 야심만만한 군주 나디르가 파슈툰 기병 1만 6000명을 선봉에 세워 당시 무굴 제국의 수도였던 델리를 잠시 점령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작 왕좌와 고어누를 가져가 자신의 수도를 꾸몄다. 마지막으로 1756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통치자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인도 북부를 공격하여 델리를 약탈하고 고갯길을 넘어 가져갈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전리품을 챙겨갔다. 이 침략자들은 모두 육로로 인도에 들어왔다. 그러나 15세기 말 포르투갈의 항해사들이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열고 난 후부터 무굴 통치자들은 바다로 오는 침략자들도 걱정해야 했다. 영국인들 자신이 그 길로 왔기 때문에 존 키니어가 오늘날이라면 위험 평가라고 부를 만한 작업을 하면서 먼저 바다로 오는 침략의 성공 가능성부터 고려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5000킬로미터에 이르는 인도의 해안선은 취약해 보였다. 특별히 경계를 하지도 않았고 기습에 대비한 방어책은 전혀 없었다. 영국인들만이 아니라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프랑스인도 그 길로 왔다. 그보다 오래 전인 711년에는 6000명의 아랍인 부대가 페르시아 만을 따라 내려와 신드를 정복하기도 했다. 윌슨은 러시아군이 그 길을 택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키니어는 직접 여행을 해보아 페르시아 마나 지역을 잘 알았기 때문에 최신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는 그쪽에는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에 그 경로로 공격할 가능성은 배제해도 좋다고 주장했다. "이쪽에는 걱정할 것이 없다." 키니어는 그렇게 기록했다. 우선 침략군은 인도로 항해해 갈 수 있는 거리에 적당한 항구를 확보해야 했다. 그럴 경우 침략군은 함대를 준비하고 진수할 만한 안전한 정박지를 홍해나 페르시아 만에서 찾아야 했다. 그곳에서 우선 배를 건조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영국 해군의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재료는 어디서 구하는가? "홍해나 페르시아 만 연안에는 목재나 그 밖의 선박용 재료를 구할 데가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허락을 하지 않는 한 재료를 멀리서 수로로 가져와 함대를 만들 수도 없다." 홍해나 페르시아 만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아주 좁아서 필요할 경우 쉽게 차단을 할 수 있었다. 키니어가 제시한 내용을 자세히 볼 때 그와 그의 동료들이 페르시아를 여행하면서 부지런히 정보를 수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키니어도 페르시아 남서부에 떡갈나무 숲이 많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너무 작아 선박 건조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더 나아가 이 나무들은 상당히 멀리 떨어진 내륙에서 자랐기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여 "엄청난 바위와 무시무시한 절벽을 넘어" 해안으로 운송해야 한다. 홍해의 에티오피아 연안에 여러 종류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키니어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페르시아의 목재보다도 못했다. 따라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범선을 모두 인도에서 건조했거나 그곳에서 가져온 목재로 건조했다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런 공격으로부터 인도를 보호하는 길은 영국 해군이 바다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키니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설사 적이 엄청난 노력과 비용을 들여 시리아 내륙이나 지중해 연안에서 운송한 재료로 함대를 건조하는 데 성공을 거둔다 해도 그런 함대를 우리의 순양함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항구가 없다." 키니어는 또 설사 그런 항구가 있다 해도 바다에 들어서는 순간 침략군 함대는 분명히 괴멸당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서 키니어는 침략군이 이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육상 통로로 관심을 돌렸다. 기본적으로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중동을 거쳐 바로 동쪽으로 오는 길 또 하나는 동남쪽으로 중앙아시아를 거치는 길이었다. 전자는 주로 유럽 침략자들이 사용하는 길이었으며 후자는 러시아가 선택할 것이 거의 분명한 길이었다. 동진하는 침략군은 몇 가지 선택과 마주쳤다. 예를 들어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발한다면 우선 터키와 페르시아를 쭉 가로질러 행군하여 인도 국경 지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아니면 흑해를 가로질러 행군하여 인도 국경 지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지중해를 가로질러 시리아 해안으로 가서 그곳에서 페르시아로 진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키니어는 마지막 방법은 지중해의 영국 함대와 정면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흑해를 건널 경우 영국 함대와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침략군은 가는 길 내내 싸우는 것보다는 거쳐 가는 땅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일종의 편의를 제공받고 싶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도록 영국이 수수방관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침략군은 인도로 가는 길 내내 일련의 엄청난 장애물들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키니어는 지금 이 땅을 직접 다녀본 경험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장애물에는 높은 산맥, 대포가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르거나 좁은 고개, 물 없는 사막, 너무 가난해서 통과하는 부대는커녕 현지 주민조차 먹고살기 힘든 지역, 적대적인 부족, 역사가 보여주듯이 하룻밤 사이에 군대를 전멸시킬 수도 있는 잔혹한 겨울 등이 포함된다. 심지어 천재적인 군인인 알렉산드로스 대제마저도 힌두쿠시 산맥의 얼음이 덮인 고개에서 실패를 맛볼 뻔했다. 이곳은 겨울에는 통과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아무도 경계를 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수천 명이 이곳에서 얼어죽거나 동상으로 죽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이곳을 건너다 잃은 병력이 중앙아시아 전쟁 전체에서 잃은 병력보다 더 많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침략자를 마주하고 있는 커다란 자연 장애물은 막강한 인더스 강과 그 다양한 지류들이었다. 침략자가 인도를 정복하려 한다면 이 2000킬로미터가 넘는 강을 건너야 했다. 이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이전의 수많은 침략자들이 증명했다. 그러나 그 침략자들 가운데 누구도 당대의 가장 선진적인 방어 전술을 배운 유럽 장교들이 지도하고 조련하는 고도의 규율을 갖춘 군대와 맞선 적은 없었다. 방어군은 잘 먹고 정기적으로 보급품을 받고 전혀 지치지도 않은 상태일 것이다. 반면 침략군은 몇 달에 걸친 행군과 곤경으로 완전히 지치고 식량과 탄약도 부족하고 숫자도 많이 줄어든 상태일 것이다. 키니어는 만일 침략군이 인더스 강까지 온다면 도강 지점으로 택할 수 있는 지점은 두 곳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만일 이전의 수많은 침략자들과 마찬가지로 카불과 카이베르 고개를 거쳐서 온다면 아톡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곳의 강은 "아주 넓고 물이 더럽고 유속이 빠르고 섬이 많으며 그 섬들은 모두 쉽게 방어할 수 있다." 그러나 근처에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곳들이 많았다. 침략군이 더 남쪽으로 내려가 아프가니스탄을 통과하여 칸다하르와 인도로 들어가는 다른 큰 관문인 볼란 고개를 통과한다면 아마 아톡에서 하류로 500킬로미터쯤 떨어진 물탄 근처에서 인더스 강을 건너려 할 터였다. 실제로 몽골군은 이곳에서 인더스 강을 헤엄쳐 건넌 적이 있었다. 키니어는 이곳이 아마 우리 국경에서 가장 취약한 곳일 것이라고 묘사했다. 키니어는 그보다 더 남쪽에 있는 길, 즉, 발루치스탄을 넘어오는 길은 배제했는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아마 포팅어와 크리스티가 그곳은 어떤 규모의 병력도 통과할 수 없는 곳이라 보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해안 쪽 길은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이용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바다 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경우 너무 취약하기 때문에 침략군이 고려하기는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