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는 나흘이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신비한 도시 헤라트였는데 이곳은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있는 유럽인 가운데는 크리스티 외에 딱 한 사람만 들어가 본 곳이었다. 헤라트는 페르시아 동부와 접한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에 자리잡고 있었고 아시아 전역에 걸친 카라반 도로망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이곳 시장에서는 코칸트와 카슈가르,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히바와 메르프에서 온 물건들을 볼 수 있었다. 도로들은 서쪽으로 메셰드, 테헤란, 케르만, 이스파한 등 페르시아의 고대 카라반 도시들로 통했다. 그러나 서쪽으로부터 오는 침략군을 두려워하는 인도의 영국인들에게 헤라트는 훨씬 더 불길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헤라트는 인도로 오는 정복자들이 전통적으로 택하던 길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길을 따르는 적군은 카이베르 고개와 볼란 고개라는 중요한 두 관문 가운데 한 곳에 이를 수 있었다. 게다가 헤라트는 광대한 사막과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산맥으로 이루어진 지역의 예외적으로 풍요롭고 비옥한 골짜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대규모 군대에게 식량과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인도에서는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크리스티의 임무는 그것이 사실인지 밝혀내는 것이었다. 포팅어와 함께 봄베이에서 출발한 지 4달이 지난 4월 18일 크리스티 성벽으로 둘러싸인 큰 도시 헤라트의 주요 관문을 통과했다. 다시 순례자의 위장을 벗고 말 장수로 행세하고 있었다. 헤라트에 사는 힌두인 상인에게 가져가는 소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는 이곳에 한 달을 머물면서 군인의 눈과 귀로 무엇이든 중요한 것들을 세심하게 살펴볼 생각이었다. 크리스티는 이렇게 말했다. "헤라트는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골짜기는 동에서 서로 뻗었으며 길이는 50킬로미터에 폭은 25킬로미터였다. 물은 산에서 솟아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강에서 공급받았으며 경작지가 많았고 눈이 닿는 곳까지 마을과 밭이 뻗어 있었다. 도시 자체의 면적은 10평방킬로미터 정도였으며 육중한 담과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북쪽 끝에는 구운 벽돌로 지은 성채가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었으며 모퉁이마다 탑이 있었다. 두 번째 해자가 이 성채를 둘러싸고 있었으며 해자 위에는 도개교가 놓여 있었다. 이 성채 안에 또 하나의 높은 벽과 물이 없는 세 번째 해자가 있었다. 도시에 다가가는 이는 누구나 이것을 장관이라고 여겼지만 크리스티는 시큰둥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요새로는 경멸할 만한 것이다. 크리스티는 헤라트가 나폴레옹이나 차르 알렉산드르의 군대같은 근대적인 포대의 지원을 받는 군대의 공격에 맞서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풍부한 부와 비옥한 땅에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 정도면 그곳으로 오는 어떤 침략군에게도 식량과 물자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었다. 헤라트를 둘러싼 시골에는 훌륭한 목초지와 더불어 말과 낙타가 많았다. 밀, 보리와 함께 온갖 종류의 싱싱한 과일도 풍부했다. 크리스티는 헤라트와 그 주변의 인구를 10만 명으로 보았다. 그 가운데 힌두인은 600명으로 대부분 부유한 상인이었다. 5월 18일 중요한 사항은 모두 파악했다고 생각한 크리스티는 고용주를 위해 말을 구입해 인도로 돌아가기 전에 북서쪽으로 320킬로미터 떨어진 페르시아의 성도 메셰드로 잠깐 순례를 하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이 내세웠던 목표인 말을 구매하지 않고 헤라트를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크리스티는 국경을 건너 페르시아 동부로 들어가면서 적잖이 마음을 놓았을 것이다. 몇 달 동안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쓴 끝에 이제 마침내 상당히 안전한 곳에 이른 것이다. 설사 그가 변장한 동인도회사 장교라는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영국과 페르시아는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큰 피해를 볼 일은 없었다. 아흐레 뒤 크리스티는 메셰드로 가는 오래된 순례길에서 벗어나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사막을 건너 이스파한에 이르렀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포팅어 중위는 지금쯤 그곳에 도착했어야 했다. 누시키에서 헤어진 후 2달 동안 크리스티의 형제라고 소개되던 장교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이 스무 살짜리 중위는 안내자로 삼을 지도도 없이 발루치스탄과 페르시아를 가로지르는 1500킬로미터의 여행에 나섰다. 그는 그 전에는 침략자들이 지나다녔지만 그 후에는 100년 동안 다른 유럽인들이 시도해보지 못할 길을 택했다. 석 달이나 이어진 이 여행에서 그는 위험한 사막을 두 군데나 통과하게 된다. 우물과 살인을 일삼는 도적 떼 사이로 그에게 방향을 잡아줄 사람은 현지 안내자들뿐이었다. 병과 그 밖의 다른 곤경에도 불구하고 포팅어는 날마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남몰래 자세히 기록했다. 침략군에게 가치가 있는 것은 모두 기록했다. 우선 우물과 강, 농작물과 그 밖의 다른 식물, 강우와 기후를 기록했다. 또 최고의 방어 위치도 짚어내고 길 주변 마을의 요새화 수준을 묘사하기도 했으며 지역 칸들의 특이성과 동맹 관계도 꼼꼼하게 적었다. 심지어 길가의 폐허와 기념물도 기록했다. 그러나 고고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시대나 역사에 관해서는 지역민의 의심스러운 이야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개략적인 지도에 자신이 가는 길도 몰래 그려놓았다. 이것은 나중에 서쪽으로부터 인도에 접근하는 최초의 군사지도로 탈바꿈하게 된다. 포팅어는 여행의 다른 부분은 자세하게 이야기했지만 어떻게 들키지 않고 이런 일을 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아마 나중에 다시 이용하기 위해 비밀로 했을 것이다. 3월 31일 포팅어는 거대한 헬만드 사막의 동남쪽 모서리를 따라 걸으며 이 사막의 존재와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한 후 다섯 명의 호위대를 이끌고 그들이 가로질러야 하는 두 사막 가운데 첫 번째 사막으로 들어갔다. 포팅어는 침략자의 통로에 이렇게 광대한 자연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 인도의 방어를 책임진 사람들에게는 매우 기쁜 소식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포팅어는 곧 왜 이 사막들이 발루치스탄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 악명을 떨치는지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몇 킬로미터 가지도 않아 그들은 고운 붉은 모래로 이루어진 거의 수직의 모래언덕과 잇따라 마주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거의 5~6미터 높이였다. 포팅어는 이야기한다. "이 언덕들 대부분은 한쪽이 수직으로 서 있으며 그 맞은편에서는 항풍이 분다. 멀리서 보면 꼭 새로 세운 벽 같다. 바람받이 쪽은 부드럽게 경사를 그리며 내려가 옆에 이어지는 모래언덕의 밑동에 이른다. 따라서 모래언덕 두 개 사이에 통로가 있는 셈이었다. "나는 내가 여행하는 방향과 대체로 일치하는 한 이 통로를 이용했다. 그러나 낙타들을 재촉하여 모래가 굽이치는 곳을 넘어갈 때 특히 바람이 불어가는 쪽 면을 올라가야 할 때는 엄청난 어려움과 피로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상황은 더 나빠졌다. 포팅어의 말을 빌리자면 모래언덕과 계속 맞붙어야 하는 싸움은 둥둥 떠다니는 모래 알갱이 때문에 나나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낙타까지 겪어야 하는 고통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짜증나는 붉은 먼지층이 사막 위를 떠돌며 눈, 코, 압에 들어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갈증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더위 때문에 갈증은 계속 더 심해졌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폭 500미터의 메마른 강바닥에 이르렀다. 그 옆에는 그 무렵 버려진 마을이 있었다. 가뭄 때문에 사람들이 떠나버린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멈췄다. 한참을 파낸 끝에 간신히 가죽 주머니 두 개 분량의 물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사막의 재료는 모래에서 단단하고 검은 자갈로 바뀌었다. 오래지 않아 공기가 찌는 듯이 뜨거워지고 회오리바람이 솟아올랐다. 곧이어 심한 폭풍이 뒤따랐다. 그렇게 큰 빗방울은 본 기억이 없었다. 주변이 완전히 깜깜해져 5미터 떨어진 것도 구분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안내자의 말을 들어보면 한여름에 사막에 몰아치는 폭풍에 비하면 그것은 온순한 편이었다. 한여름에는 여행자들이 아예 지나다닐 수가 없었다. 이런 폭풍에 수반되는 용광로처럼 뜨거운 바람을 발루치스탄 사람들은 불길 또는 역병이라고 불렀다. 이 바람은 그 힘으로 낙타를 죽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방비를 하지 않은 사람은 산 채로 마구 때려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을 봤다고 하는 포팅어의 호위대의 말에 따르면 근육은 경직되고 피부는 오그라들고 마치 살에 불이 붙은 듯 몸 전체에 고통이 퍼진다. 그러나 피부가 깊이 갈라져 피가 나오는 바람에 고통은 금세 끝난다. 그러나 가끔 며칠은 아니더라도 몇 시간씩 고통을 겪다 죽는 일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