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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에 맞선 러시아 도깨비, 영국의 장군 로버트 윌슨

짜짱면 2026. 1. 10. 11:06

1812년 여름 나폴레옹의 군대가 파멸을 향해 행군하면서 통과하였던 발트 해의 도시 빌뉴스에는 지금도 명판 두 개가 붙은 소막한 기념비가 서 있다. 이 둘을 합치면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의 전모를 알 수 있다. 모스크바를 향하고 있는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812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40만 명을 이끌고 이 길을 지나갔다." 그 반대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812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9000명을 이끌고 이 길을 지나갔다." 영국은 나폴레옹의 대군단이 뿔뿔이 흩어져 러시아의 눈밭을 헤치며 되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승리는 확실해 보였다. 모스크바가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함락되어 불타고 있다는 소식은 이 사실을 확인해주는 듯했다. 그러나 몇 주 동안 엇갈린 소문이 난무하다가 차츰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에 불을 놓은 사람들은 프랑스군이 아니라 러시아인들 자신이었다. 그들은 나폴레옹이 그곳에서 찾고자 하였던 식량과 그 밖의 보급 물자를 태워버린 것이다. 그 후에 벌어진 일의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져 있기에 여기서 다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겨울이 다가왔고 식량이 바닥을 드러낸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우선 스몰렌스크에서 그리고 마침내 러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코사크 부대와 게릴라 무리에게 끊임없이 시달리다가 곧 생존을 위해 말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철수는 이제 패주로 바뀌었고 프랑스 병사들은 적의 공격만이 아니라 동상, 질병, 기아로 수만 명씩 죽어나갔다. 네 장군의 후위대는 얼어붙은 드네프르 강을 건너다 얼음이 꺼지는 바람에 3분의 2가 익사했다. 결국 인도를 포함한 동방 정복을 위해 길러냈던 나폴레옹의 대군은 박살이 나고 사기가 떨어진 자투리만 러시아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알렉산드르는 이제 하느님으로부터 세상에서 나폴레옹을 없애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확신하여 그들을 자신의 국경 너머로 쫓아버리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유럽의 반을 가로지르며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1814년 3월 30일 의기양양하게 파리에 입성했다. 영국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의 몰락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알렉산드르가 전에 표리부동하게 나폴레옹과 합세하여 영국에 대적했다는 사실은 깔끔하게도 잊어버렸다. 안도감이 다른 모든 고려 사항들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신문들은 앞다투어 러시아인에게 찬사를 보내면서 상상이든 사실이든 가리지 않고 그들의 많은 미덕을 찬양하였다. 일반 러시아 병사, 특히 멋진 코사크 병사의 영웅적이고 희생적인 행위는 영국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사나운 코사크 병사들은 최고급 호텔의 안락한 침대보다 자기 말 옆의 짚을 넣은 요에서 자는 것을 더 좋아한다거나 자신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된 주부가 집안일하는 것을 거꾸로 돕는다거나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유럽에서 런던으로 흘러들었다. 그해 봄에 코사크 병사 한 명이 런던에 도착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14년 전 차르 파벨의 명령에 따라서 인도 원정에 부하들을 이끌고 갔던 코사크 족장도 환영을 받았다. 그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옥스퍼드의 명예 학위를 포함한 온갖 명예를 화환처럼 받아들고 선물까지 잔뜩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러시아를 상대로 한 이런 연애는 오래갈 운명이 아니었다. 몇몇 사람들이 이미 나폴레옹 대신 새로운 괴물이 창조되었다는 불편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외무장관 캐슬레이 경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르가 1814년에 소집된 빈회의에서 유럽 지도를 다시 그릴 것, 폴란드 전체를 러시아의 통제하에 둘 것을 요구하자 캐슬레이는 러시아가 이미 유럽에서 막강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차르는 고집을 부렸고 두 강국은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알렉산드르가 폴란드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나누어 갖기로 합의를 하고 나서야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 안전하게 갇혀 있을 때 러시아가 최종적으로 확정한 유럽 여러 나라와의 국경은 그 후 100년 동안 러시아의 서쪽 확장의 한계선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아시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야망을 제어할 빈회의가 없었기 때문에 곧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러시아 도깨비를 만들어낸 사람을 한 명만 꼽으라고 한다면 많은 훈장을 받은 영국의 장군 로버트 윌슨 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전쟁에 참전한 용사이며 전장의 안팎에서 격한 성격으로 유명한 윌슨은 오래전부터 러시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르가 1807년 틸시트에서 바지선을 탔을 때 남긴 이제는 악명이 높아진 말을 처음 보고한 사람도 윌슨이었다. "나는 당신만큼이나 영국을 싫어하며 영국과 싸우는 어떤 일에서도 당신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소." 윌슨의 첩자 한 명이 알렉산드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윌슨은 원래 러시아인을 매우 존경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러시아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등을 돌리자 영국은 윌슨에게 알렉산드르의 군대를 정찰하는 임무를 정식으로 부여했다. 윌슨은 비전투원 신분이기는 했지만 러시아가 침략군과 싸우는 전투 현장에 가능한 한 자주 나가 보았다. 이런 용감한 태도 때문에 그는 차르의 존경과 우정을 얻었으며 윌슨은 이미 갖고 있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작센, 터키 작위에 러시아 작위까지 보탤 수 있었다. 윌슨 장군은 나중에 모스크바가 불타는 것을 목격하고 나폴레옹의 패전 소식을 처음으로 영국에 전하게 된다. 그러나 윌슨은 런던에 돌아오자 혼자서 영국의 동맹자이자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에 유럽의 구원자로 비치던 러시아에 대항하는 1인전쟁을 시작하여 비난을 받았다. 윌슨은 우선 러시아 병사, 특히 언론과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코사크 병사의 기사도에 관한 낭만적 관념들을 부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는 코사크 병사들이 프랑스군 포로에게 잔혹 행위는 유럽 군대의 기준에서 보면 너무 끔찍하다고 주장했다. 아무런 방어력이 없는 포로들이 수도없이 산 채로 묻혔으며 어떤 포로들은 줄지어 서서 곤봉과 도리깨로 무장한 농민에게 죽을 때까지 얻어맞기도 했다. 포로들은 운명을 기다리는 동안 옷을 모두 빼앗겨 눈밭에 벌거벗은 채 서 있었다. 윌슨은 특히 러시아 여자들이 자신들의 손에 넘어온 불행한 프랑스인들에게 야만적인 행동을 했다고 전했다. 영국에서는 윌슨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유명하고 경험많은 군인이었으며 식인을 포함한 이런 잔혹 행위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다. 윌슨은 아직 승리의 영광에 취해 있던 차르의 장군들도 봐주지 않았다. 윌슨은 이 장군들이 직업군인으로서 무능하여 달아나는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데 실패했으며 그 결과 나폴레옹이 온전한 1개 군단을 이끌고 탈출하는 것을 허용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러시아의 겨울이 침략군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만족했다는 것이다. 윌슨은 당시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1만 명, 아니 5000명만 지휘할 수 있었다면 보나파르트는 두 번 다시 프랑스의 왕좌에 앉지 못했을 것이다." 윌슨은 심지어 차르가 자신에게 그의 참모총장인 쿠투조프 원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지만 쿠투조프가 강력한 친구들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쫓아내지 못한다고 고백했다는 주장까지 했다.